음력 5월 4일 · 전시/피란 · 선조 25년 5월 4일

평양이냐 보산이냐… 피란 조정, 길 위에서 밤 회의 열다

금교역 떠나 평산 거쳐 보산관 도착, 인마는 굶고 신하들은 지도를 붙잡다

선조께서는 금교역을 출발해 흥의역의 평산부에서 낮참을 들고, 저녁 무렵 보산관에 이르렀다. 실록의 한 줄은 간단하지만, 그 길 위에는 젖은 신발과 지친 말, 그리고 “오늘 숙소가 어디입니까”라는 절박한 질문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피란 조정의 하루는 어가가 움직이는 만큼 나라의 숨도 함께 옮겨 가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길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승지와 비변사 당상들이 들어와 평양으로 옮기는 일을 논의하자, 회의장은 순식간에 길 찾기 판이 되었다. 윤두수는 중로에 신할·황윤용·해주 목사 등이 병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있으니 다시 대장을 보낼 필요는 없다고 아뢰었고, 이헌국은 해가 길어진 틈을 타 안성과 용천을 지나 평양까지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빠른 길은 늘 사람과 말을 먼저 시험한다. 이헌국은 길을 가는 데만 힘쓰고 음식을 들지 않으면 옥체가 상할까 염려된다고 아뢰었다. 노직도 저물녘에 들어가면 인마가 모두 굶게 된다고 말했으니, 이날 회의의 진짜 의제는 “평양 방어”와 함께 “밥은 언제 먹는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은 “여기서 용천이 얼마나 남았는가” 하고 물었고, 결국 “가다가 보산에서 묵자”고 했다. 이 말 한마디에 지친 말들의 귀가 잠깐 살아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관원들은 숙소가 정해져도 쉬지 못했다. 평양으로 가는 길, 대동강 상류의 다른 길, 성천·평양·영변 같은 험한 곳, 경성 함락 소문까지 한꺼번에 회의상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피란길의 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어느 길은 왕의 안전을 뜻했고, 어느 길은 군사의 배치와 민심의 흔들림을 뜻했다. 보산관의 저녁은 잠자리라기보다 야전 편집회의실에 가까웠다. 춘추관 편집부 평: 나라가 위급하면 객사 한 칸도 국정상황실이 된다.

“평양은 지킬 수 있습니다”… 윤두수, 무너진 도성 앞에서 북방 방어론 꺼내다

【전략/방어】 선조 25년 5월 4일

윤두수는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받아 나주로 파천했으나 결국 중흥을 이루었다는 전례를 들었다. 도성은 잃었지만 평양은 지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회의장에 잠시나마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이 걸린 셈이다.

이 말은 단순한 역사 지식 자랑이 아니었다. 피란 조정에는 명분도 필요했고, 군신의 마음을 붙들 이야기 또한 필요했다. 한 익명의 신하는 속으로 “전례가 밥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평양은 단지 다음 목적지가 아니었다. 무너진 한양 뒤에서 다시 버틸 수 있는 북방의 기둥으로 거론되었다. 그래서 이날 보산관 회의는 숙박 회의가 아니라, 조선이 어디서 다시 숨을 고를 것인가를 정하는 회의였다.

“지나는 곳마다 백성이 눈물”… 황해도 민심, 피란길 조정의 거울 되다

【민심/행정】 선조 25년 5월 4일

김응남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눈물짓는 것을 보니 인심을 알 수 있다고 아뢰었다. 백성들의 눈물은 조정에 보내는 가장 짧고 무거운 상소였다. 종이도 붓도 없지만, 길가의 울음은 어느 장계보다 또렷했다.

홍인상은 황해도의 인심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수령이 감사의 명을 잘 따랐기 때문이라며, 감사에게 은전이 없을 수 없다고 했다. 전쟁통에도 행정이 버티는 곳은 민심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편집부식으로 말하면, 수령의 출근부가 곧 지방의 방파제가 된 날이다.

저잣거리 백성들은 어가 행렬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임금이 지나가니 나라가 아직 살아 있는 듯하고, 임금이 피란 중이니 나라가 크게 다친 듯했다. 그 양쪽 감정이 섞여 길가의 눈물이 되었을 것이다.

경성 소식 끊기고 역로 단절… “사람 보내 탐지하라” 정보전 비상

【군사/정보】 선조 25년 5월 4일

상은 신하들에게 아직 경성 소식을 못 들었느냐고 물었다. 이충원은 적병이 동대문으로 들어갔다고 들었다고 아뢰었다. 도성의 소식이 풍문과 단편 보고로만 들어오는 순간, 회의장 안의 공기는 더 무거워졌을 것이다.

윤두수는 역로가 단절되었으니 사람을 보내 탐지해 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전쟁에서 칼과 창만큼 무서운 것이 소식의 끊김이다. 소식이 없으면 적은 실제보다 커지고, 아군의 마음은 실제보다 먼저 무너진다.

상은 적병이 얼마나 되는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말이 사실인지도 물었다. 이는 패전의 혼란 속에 떠도는 소문이 얼마나 조정을 흔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보산관의 밤에는 지도뿐 아니라 뜬소문까지 함께 펼쳐져 있었다.

도망간 마부들 속 네 사람 남았다… 비상시 명기 논쟁까지 불붙다

【인사/비상조치】 선조 25년 5월 4일

윤두수는 내시위와 사복이 견마를 맡아야 하는데 모두 도망치고, 단지 이마 네 사람만 남았다고 아뢰었다. 피란길에서 말은 곧 국가 운송망인데, 그 말을 돌볼 사람들이 사라졌으니 조정의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다. 어느 관원은 말고삐보다 사람 마음 붙잡기가 더 어렵다고 느꼈을 것이다.

상은 황해 감사 조인득을 가자하고, 남은 이마 김응수와 오치운을 동반에 서용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충원이 아무리 어지러운 때라도 명기부터 더럽힐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전쟁 중에도 관직의 격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상은 승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지금은 상규만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다. 이 장면은 전쟁기의 조정이 어떤 줄타기를 했는지 잘 보여준다. 평시의 법도와 비상시의 실용이 서로 멱살을 잡은 가운데, 보산관의 밤은 더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