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감마마, 오후에 황주 도착… 말도 사람도 ‘오늘은 여기까지’ 선언
피란 행렬은 북으로, 신하들의 다크서클은 아래로… 황주 관아에 임시 작전실 개장
선조께서 5월 6일 오후 황주에 이르셨다. 한양을 떠난 뒤 이어진 피란길은 지도 위에서는 선 하나지만, 실제 길 위에서는 먼지와 허기와 ‘아직 멀었습니까’라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는 장편 서사였다.
황주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은 쉴 틈도 없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짐을 풀었고, 누군가는 장계를 펼쳤으며, 누군가는 앉기도 전에 다시 일어나 ‘군량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춘추관 편집부는 이 장면을 두고 ‘도착은 했으나 휴식은 도착하지 못했다’고 평한다.
길가 백성들은 임금의 행차를 바라보며 놀람과 걱정을 함께 삼켰다. 임금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든든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전쟁도 가까이 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한 노인은 ‘나라님도 뛰시니 우리도 정신줄을 단단히 묶어야겠다’며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신하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황주빛이었다. 피란길의 피곤함, 왜군의 압박, 명나라 원병을 기다리는 초조함이 한꺼번에 얹히니, 대신들의 얼굴은 회의록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익명의 관원은 ‘붓을 들 힘은 없는데 적을 막을 방책은 써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황주는 단순한 중간 기착지가 아니었다. 여기서 군량을 모으고, 민심을 살피고, 평양으로 향할 다음 걸음을 정해야 했다. 오늘의 황주 도착은 초라한 피란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너진 나라가 다시 숨을 고르는 매우 고단한 쉼표였다.
황해 감사 조인득 등 인견… ‘쌀은 어디 있고, 민심은 어디로 갔나’ 긴급 회의
상께서는 황해 감사 조인득 등을 인견하고 군량 이송과 황해도의 인심을 논의했다. 전쟁 중 회의의 첫째도 밥, 둘째도 밥, 셋째는 밥을 나를 길이었다. 병법서가 아무리 두꺼워도 빈 솥 앞에서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감사와 수령들은 각 고을 사정을 아뢰느라 진땀을 흘렸다. 어느 고을은 곡식이 모자라고, 어느 길은 불안하며, 어느 백성은 이미 마음이 반쯤 도망갔다. 조정은 군량 장부를 들여다보다가 마치 점괘를 보는 사람처럼 깊은 침묵에 빠졌다.
저잣거리에서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제일 먼저 찾는 것이 결국 쌀독’이라는 말이 돌았다. 춘추관도 동의한다. 깃발은 높이 들 수 있어도, 병사는 밥을 먹어야 그 깃발 아래에 선다.
무기 만들라, 군대 챙기라… 병조의 하루가 사흘처럼 늘어나다
피란 조정에서는 무기 제조와 호종 군대 문제도 계속 논의되었다. 칼과 창은 갑자기 땅에서 솟지 않고, 군사는 말 한마디로 배부르지 않으니, 병조의 장부는 밤에도 잠들지 못했다.
한 군관은 ‘화살은 더 만들라 하시고, 말은 덜 지치게 하라 하시니, 신묘한 도술이 필요하다’고 농담했다가 곧바로 눈치를 보았다. 전쟁 중 농담은 짧아야 오래 산다는 것이 관가의 새 예법이다.
그럼에도 무기와 군대 정비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왜군은 기다려 주지 않고, 피란길의 먼지는 적의 발걸음을 막아 주지 않는다. 결국 조정은 피곤한 손으로라도 창끝을 다시 세워야 했다.
살곶이 다리 공사 감독 명령… 돌은 무겁고 책임은 더 무겁다
세종 때에는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살곶이 내 다리 놓는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전쟁 소식만 가득한 지면에 다리 공사라니 밋밋해 보일 수 있으나, 나라 살림은 칼끝뿐 아니라 길 위에서도 굴러간다.
공사장 백성들은 돌을 나르며 ‘다리가 놓이면 편하긴 하겠지만, 놓는 동안 내 허리는 어디에 놓느냐’고 푸념했을 법하다. 박자청 같은 공사 전문가가 나섰으니 일은 굴러갔겠지만, 돌은 결코 스스로 굴러가 주지 않는다.
춘추관 편집부는 이 기사를 ‘조선 인프라 특집’으로 분류한다. 훗날 누군가 편히 건너는 다리 아래에는, 오늘 이름 없이 땀 흘린 사람들의 한숨이 교각처럼 박혀 있다.
조정 회의 또 회의… 대신들, 앉은 자리에서 나이 한 살 더 먹은 표정
5월 6일의 실록을 넘기면 전쟁과 행정, 인견과 보고가 줄줄이 이어진다. 조정의 하루는 해가 뜨면 시작해 해가 져도 끝나지 않았고, 대신들의 등은 관복보다 회의에 더 익숙해졌다.
익명의 승지는 ‘회의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음 회의가 문밖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말이 사실인지 과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록의 행간에는 분명히 그런 피로가 묻어 있다.
백성들이 보기엔 높은 분들의 회의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 군량이 움직이고, 다리가 놓이고, 관원이 갈리고, 전쟁의 다음 걸음이 정해진다. 문제는 회의가 많다고 답도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춘추관은 붓을 잠시 내려놓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